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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 안의 우상들
사나이로
2007. 1. 6. 11:16
출애굽기 20장에는 무릇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듯이 “십계명”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케 하신 다음 시내 산에서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위해 맺으시는 언약이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을 위한 한 경륜이 구체적으로 시작되고, 그들이 국가로서의 공식적인 틀을 갖추게 된다는 점에서 이 시점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과 언약을 맺는 장면에서 십계명을 주시는데, 가장 처음에 나오는 두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와『너는 어떤 새긴 형상도 네게 만들지 말고 또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지니라.』(출 20:4,5)로서, 바로 우상 숭배를 금하시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처음 두 계명이 이러한 것은, 그들이 떠나왔던 이집트에도 많은 신들이 있고, 그들이 들어갈 카나안 땅에도 많은 신들이 있기에, 그들이 그 신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그 백성을 이방인들에게서 완전히 구별하시어, 하나님의 “독특한 보물”(출 19:5)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별된 백성의 의무는 모든 신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또한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두 계명을 살펴보면, 둘 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첫째 계명은 구체적인 형상이 있든지 없든지, 구체화된 사물을 대상으로 하든지 추상적인 개념이든지 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를 금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그 전반적인 우상 숭배 중에서 구체적으로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둘째 계명에 따라서 바알이나 아스타롯이나 다곤이나 어떤 다른 신이라도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아야 했고, 또 첫째 계명에 따라서 하늘의 군상들이나 천사들이나 어떤 종류의 영들과도 교류하지 말아야 했다.
중요한 것은 이 계명들이 단순히 과거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하나님께 구속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면 우리도 세상에서 하나님께 구속받은 거룩한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이 “독특한 보물”이요 “거룩한 민족”이라면(출 19:4,5)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독특한 백성”이요 또 “거룩한 민족”이다(벧전 2:9). 우리도 세상에서 신들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오직 그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여전히 많은 우상들을 본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자처하는 곳에서 보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여러 가지 우상들을 두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에서 그들의 교회에다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의 형상들을 만들거나 그리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비단 카톨릭에서만 자행되는 죄악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것은 개신교회들에도 있다.
개신교회들은 마리아 형상은 만들지 않지만, 십자가 형상은 만든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에 대한 크고 작은 조각품들이 마리아 형상들과 함께 판매되고 있거니와, 그러한 형상이나 그림들을 갖고 있지 않은 가정이나 교회들이 있는가 보라. 천주교에서는 마리아 형상 앞에서 기도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십자가 형상 앞에서 그것에다가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신 것은 이방신들의 형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 하신 것이다.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다고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금송아지였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이처럼 왜곡되는 법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것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서의 우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 즉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이다. 누구나 외적으로 규제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은 제거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겉으로는 우상들을 버리고 성막이나 성전으로 모였어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않았을 때 그들은 언제고 다시 우상에게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구약의 역사서들을 통해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음 속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말씀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면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탐심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탐심은 우상 숭배다(골 3:5). 구약에서는 하나님이냐 이방신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 6:24에서는『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나 재물, 둘 중의 하나가 그 사람을 주관하는 주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 다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재물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재물을 조금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섬기게” 된다. 그러므로 탐심은 우상 숭배다.
문제는 이러한 탐심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비리들을 본다. 그 예들로는, 목회자들의 재산 축적, 총회장 선거 비리, 교회 세습 등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탐욕을 버렸다고 하고 교회에 들어온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 탐욕이 다시 일어나는데, 이들은 교인들에게서 헌금을 뜯어내어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금품살포까지 해가며 자리 싸움을 하고 있으며, 그토록 어렵게 이루어 놓은 자리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어 세습까지 하는 것이다.
일찍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와 비슷한 일을 했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교만하여서, 자신을 높이고, 잔치에서는 최상의 자리와 회당에서는 가장 좋은 좌석을 좋아하고,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성전보다 성전 안에 있는 금과 물질의 십일조에만 관심을 두었던 자들이다(마 23장). 이들은 당시의 영적인 권력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이 그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자들이다. 성경은 그들을 향해 “탐욕스러운 바리새인들”이라 부른다(눅 16:14).
교회 내에서의 우상은 비단 탐욕만이 아니다. 그 우상들 중에는 목사들의 “학위”가 있다. 어찌보면 학위나 지적 우월함이 물질적인 탐욕보다도 더 큰 우상이 된다. 어떤 목사들은 자기를 목사라고 소개하기보다는 박사로 소개하길 좋아하며, 웬만한 교회의 주보나 소개지를 보면 담임 목사에게 박사라는 칭호로 소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옷단을 넓혀 입느니라.』(마 23:5)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랍비나 선생이라 불리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하신다(마 23:8,10).
이것은 단지 그들이 우쭐해 하는 명예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학위가 있으면 있는 만큼 성경을 무시하게 된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옷단이 넓어질수록, 그들의 옷단에 줄 수가 많아질수록 그들은 성경 위에 그들의 권위를 놓는다. 그들의 학식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발전하는데, 실제로 학위가 높은 사람들 중에서 성경을 최종권위로 삼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그들은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러이러한 의미일 뿐이다.” 하고 자신의 해석을 첨가하기 좋아한다. 많은 박사들이 예언의 문자적인 성취를 거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천년 통치를 거부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보존을 믿지 않으며, 심지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마저도 부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며, 복음의 진리를 가린다. 이들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보다는 교부들의 말이나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기 좋아하고, 심지어 설교단에서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노략질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셨는데(골 2:8), 이들은 철학과 사상을 우상으로 삼아버렸다. 실제로 철학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성경과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본주의 사상으로 세상을 망쳐버린 자들이 아닌가? 철학자들 중에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었던 자들이 있었는가? 철학자들 중에 자기 자신을 최종권위로 두지 않았던 자들이 있었는가? 그들이 세상 철학들로 교육받는다는 것은 신학대학들의 교육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양 철학들로 교육받은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 철학적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성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교회내의 우상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 우상에 따라서 그들의 교리와 실행을 버린다. 그래도 전에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여러 가지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 성경 공부의 내용이 어떠냐는 것을 떠나서, 우선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만으로 본다면 그래도 건전한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경공부로 성도들을 모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친교 프로그램으로 모으려 한다. 요즘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열린 예배, 또는 구도자 예배라 불릴 수 있는 콘서트 형식의 음악 예배이다. 음악 뿐 아니라 연극 등도 문화적인 행사를 도입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말로는 불신자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한다지만, 그냥 행사로 끝나는 경우가 전부이다.
전에는 세상 음악적 요소를 갖춘 밴드를 그래도 “보수주의” 교회들은 배격했지만, 그런 요소들이 있어야 교회가 양적 팽창을 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그런 요소들을 수용한다. 심지어 근본주의를 자처하는 교회들마저도 열린 예배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은사주의 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에 장로교 통합측 교단에서 은사주의를 이단에서 풀어주기(?) 전까지만 해도 은사주의 운동은 그들에게 이단으로 간주되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보니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상 열린 예배와 은사주의는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으며, 은사주의와 교회성장 또한 불가분의 관계다. 교회성장 연구가들 중에는 은사주의자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우리 나라의 명성훈 목사(교회성장 연구소)와 미국의 피터 와그너(풀러 신학교) 등이 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성경은 뒷전이다.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성경 구절들 몇 개면 충분하다. 성경보다는 체험이나 교회성장 이론, 사회학적 고찰, 제자훈련, 교인들을 모으기 위한 전략 등이 앞서고 있으니 어찌 우상이 아니겠는가?
전통과 체험 또한 우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명한 절대 기준 앞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해오던 관습 때문이다. 개역성경이 잘못된 것은 알지만 전통적으로 계속 써 왔기 때문에 쓰고 있다든지, 크리스마스의 유래가 이교도적인 것인줄은 알지만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지켜왔으니까 계속 지킨다든지, 예수님께서 요단강 물 속에서 침례받으신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선대에서부터 전통적으로 세례를 주었으니까 그냥 세례를 준다든지 하는 것이다. 전통이 성경과 일치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이 성경에 위배된다면 당연히 전통을 따르지 말고 성경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전통들은 성경 아래에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통을 성경보다 앞세웠고, 아예 성경보다 높은 권위로 인정되고 있는 상태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게『너희는 너희가 전수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느니라.』(막 7:13)고 말씀하셨거니와, 이들에게는 바로 전통이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제시하여도 듣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이 우상이 되는 예는 은사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될 수 있다. 방언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성경 여기저기를 펴서 보여주고,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실제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나는 분명히 방언을 받았고, 방언으로 기도하면 은혜롭다.”라고 말해버리면 끝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의 방언은 분명한 외국어이며, 사도들의 표적이고, 고린도전서 14장은 문맥적으로만 보아도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이라는 것,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 것이며(고전 14:28), 여자들은 잠잠히 하라(고전 14:34)는 말씀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체험만을 강조하면서 이 말씀들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여러 기도원들과 은사주의 교회들에서 실행되고 있는 거짓 은사로서의 소위 “신유”에 대해서도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던 간에 그들이 치유받았다는 “체험”만을 강조한 채 성경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이고도 절대적인 권위 위에 자기들의 체험과 전통을 올려놓는 것이 아닌가?
서로 다른 권위가 부딪치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 6:24),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요일 2: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할 수 없다(고후 6:15) 등, 여러 번에 걸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흑백논리일 수밖에 없다. 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면 우상이 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인데,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앞세운다면 우리는 그것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물을 섬기는 것이고, 지식을 섬기는 것이고, 철학을 섬기는 것이고, 인간적인 권위와 전통을 섬기는 것이고, 자신의 체험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우상 숭배가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다.
에스겔 8장에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환상 가운데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시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서 에스겔은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기막힌 우상 숭배의 모습을 목격한다. 첫째는 성전 담에 갖가지 모양의 기어다니는 것들과 가증스런 짐승들과 우상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앞에서 사람들이 향을 피워 올리고 있었고(겔 8:10,11), 둘째는 주의 집의 대문 입구에서 여인들이 탐무스를 위해 울고 있었으며(겔 8:14), 셋째는 성전의 문, 즉 제단 앞에서 사람들이 태양 쪽을 향하여 태양을 경배하는 것이었다(겔 8:16).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증한 범죄로 인해 유다를 심판하셨다. 이러한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는 전혀 머무를 수 없으며, 이쯤되면 도저히 성전이라 불릴 수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에스겔의 이 기사를 읽을 때 유다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잘못했다고 비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라.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수많은 우상들로 가득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을 것같아 보이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자처하는 곳, 진리의 기둥과 터전(딤전 3:15)이 되어야 할 곳들에서 이러한 우상 숭배가 행해진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이 세상의 배교에 대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실 수가 있으며, 어찌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처음 두 계명이 이러한 것은, 그들이 떠나왔던 이집트에도 많은 신들이 있고, 그들이 들어갈 카나안 땅에도 많은 신들이 있기에, 그들이 그 신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그 백성을 이방인들에게서 완전히 구별하시어, 하나님의 “독특한 보물”(출 19:5)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별된 백성의 의무는 모든 신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또한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두 계명을 살펴보면, 둘 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첫째 계명은 구체적인 형상이 있든지 없든지, 구체화된 사물을 대상으로 하든지 추상적인 개념이든지 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를 금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그 전반적인 우상 숭배 중에서 구체적으로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둘째 계명에 따라서 바알이나 아스타롯이나 다곤이나 어떤 다른 신이라도 형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아야 했고, 또 첫째 계명에 따라서 하늘의 군상들이나 천사들이나 어떤 종류의 영들과도 교류하지 말아야 했다.
중요한 것은 이 계명들이 단순히 과거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하나님께 구속받은 거룩한 백성이라면 우리도 세상에서 하나님께 구속받은 거룩한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이 “독특한 보물”이요 “거룩한 민족”이라면(출 19:4,5)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독특한 백성”이요 또 “거룩한 민족”이다(벧전 2:9). 우리도 세상에서 신들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오직 그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여전히 많은 우상들을 본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자처하는 곳에서 보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여러 가지 우상들을 두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에서 그들의 교회에다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의 형상들을 만들거나 그리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비단 카톨릭에서만 자행되는 죄악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것은 개신교회들에도 있다.
개신교회들은 마리아 형상은 만들지 않지만, 십자가 형상은 만든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에 대한 크고 작은 조각품들이 마리아 형상들과 함께 판매되고 있거니와, 그러한 형상이나 그림들을 갖고 있지 않은 가정이나 교회들이 있는가 보라. 천주교에서는 마리아 형상 앞에서 기도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십자가 형상 앞에서 그것에다가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신 것은 이방신들의 형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 하신 것이다.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다고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금송아지였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이처럼 왜곡되는 법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것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서의 우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 즉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이다. 누구나 외적으로 규제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은 제거하기 어려운 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겉으로는 우상들을 버리고 성막이나 성전으로 모였어도,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않았을 때 그들은 언제고 다시 우상에게로 나아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구약의 역사서들을 통해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음 속에 있는 우상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말씀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면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탐심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탐심은 우상 숭배다(골 3:5). 구약에서는 하나님이냐 이방신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마태복음 6:24에서는『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나 재물, 둘 중의 하나가 그 사람을 주관하는 주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 다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재물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그리고 재물을 조금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섬기게” 된다. 그러므로 탐심은 우상 숭배다.
문제는 이러한 탐심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비리들을 본다. 그 예들로는, 목회자들의 재산 축적, 총회장 선거 비리, 교회 세습 등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탐욕을 버렸다고 하고 교회에 들어온다. 그러나 교회에서 그 탐욕이 다시 일어나는데, 이들은 교인들에게서 헌금을 뜯어내어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금품살포까지 해가며 자리 싸움을 하고 있으며, 그토록 어렵게 이루어 놓은 자리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어 세습까지 하는 것이다.
일찍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와 비슷한 일을 했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교만하여서, 자신을 높이고, 잔치에서는 최상의 자리와 회당에서는 가장 좋은 좌석을 좋아하고,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성전보다 성전 안에 있는 금과 물질의 십일조에만 관심을 두었던 자들이다(마 23장). 이들은 당시의 영적인 권력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셔야 할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이 그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자들이다. 성경은 그들을 향해 “탐욕스러운 바리새인들”이라 부른다(눅 16:14).
교회 내에서의 우상은 비단 탐욕만이 아니다. 그 우상들 중에는 목사들의 “학위”가 있다. 어찌보면 학위나 지적 우월함이 물질적인 탐욕보다도 더 큰 우상이 된다. 어떤 목사들은 자기를 목사라고 소개하기보다는 박사로 소개하길 좋아하며, 웬만한 교회의 주보나 소개지를 보면 담임 목사에게 박사라는 칭호로 소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옷단을 넓혀 입느니라.』(마 23:5)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랍비나 선생이라 불리기를 좋아하지 말라고 하신다(마 23:8,10).
이것은 단지 그들이 우쭐해 하는 명예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학위가 있으면 있는 만큼 성경을 무시하게 된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옷단이 넓어질수록, 그들의 옷단에 줄 수가 많아질수록 그들은 성경 위에 그들의 권위를 놓는다. 그들의 학식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발전하는데, 실제로 학위가 높은 사람들 중에서 성경을 최종권위로 삼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그들은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러이러한 의미일 뿐이다.” 하고 자신의 해석을 첨가하기 좋아한다. 많은 박사들이 예언의 문자적인 성취를 거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천년 통치를 거부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보존을 믿지 않으며, 심지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마저도 부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며, 복음의 진리를 가린다. 이들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보다는 교부들의 말이나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기 좋아하고, 심지어 설교단에서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노략질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셨는데(골 2:8), 이들은 철학과 사상을 우상으로 삼아버렸다. 실제로 철학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성경과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본주의 사상으로 세상을 망쳐버린 자들이 아닌가? 철학자들 중에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었던 자들이 있었는가? 철학자들 중에 자기 자신을 최종권위로 두지 않았던 자들이 있었는가? 그들이 세상 철학들로 교육받는다는 것은 신학대학들의 교육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양 철학들로 교육받은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 철학적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성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교회내의 우상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 우상에 따라서 그들의 교리와 실행을 버린다. 그래도 전에는 교회성장을 위해서 여러 가지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 성경 공부의 내용이 어떠냐는 것을 떠나서, 우선 성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만으로 본다면 그래도 건전한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경공부로 성도들을 모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친교 프로그램으로 모으려 한다. 요즘 크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열린 예배, 또는 구도자 예배라 불릴 수 있는 콘서트 형식의 음악 예배이다. 음악 뿐 아니라 연극 등도 문화적인 행사를 도입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말로는 불신자들을 초청해 복음을 전한다지만, 그냥 행사로 끝나는 경우가 전부이다.
전에는 세상 음악적 요소를 갖춘 밴드를 그래도 “보수주의” 교회들은 배격했지만, 그런 요소들이 있어야 교회가 양적 팽창을 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그런 요소들을 수용한다. 심지어 근본주의를 자처하는 교회들마저도 열린 예배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은사주의 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에 장로교 통합측 교단에서 은사주의를 이단에서 풀어주기(?) 전까지만 해도 은사주의 운동은 그들에게 이단으로 간주되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보니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상 열린 예배와 은사주의는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으며, 은사주의와 교회성장 또한 불가분의 관계다. 교회성장 연구가들 중에는 은사주의자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우리 나라의 명성훈 목사(교회성장 연구소)와 미국의 피터 와그너(풀러 신학교) 등이 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성경은 뒷전이다.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성경 구절들 몇 개면 충분하다. 성경보다는 체험이나 교회성장 이론, 사회학적 고찰, 제자훈련, 교인들을 모으기 위한 전략 등이 앞서고 있으니 어찌 우상이 아니겠는가?
전통과 체험 또한 우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분명한 절대 기준 앞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해오던 관습 때문이다. 개역성경이 잘못된 것은 알지만 전통적으로 계속 써 왔기 때문에 쓰고 있다든지, 크리스마스의 유래가 이교도적인 것인줄은 알지만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지켜왔으니까 계속 지킨다든지, 예수님께서 요단강 물 속에서 침례받으신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선대에서부터 전통적으로 세례를 주었으니까 그냥 세례를 준다든지 하는 것이다. 전통이 성경과 일치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이 성경에 위배된다면 당연히 전통을 따르지 말고 성경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전통들은 성경 아래에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통을 성경보다 앞세웠고, 아예 성경보다 높은 권위로 인정되고 있는 상태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게『너희는 너희가 전수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느니라.』(막 7:13)고 말씀하셨거니와, 이들에게는 바로 전통이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제시하여도 듣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이 우상이 되는 예는 은사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될 수 있다. 방언이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성경 여기저기를 펴서 보여주고,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실제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나는 분명히 방언을 받았고, 방언으로 기도하면 은혜롭다.”라고 말해버리면 끝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의 방언은 분명한 외국어이며, 사도들의 표적이고, 고린도전서 14장은 문맥적으로만 보아도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이라는 것,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 것이며(고전 14:28), 여자들은 잠잠히 하라(고전 14:34)는 말씀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의 체험만을 강조하면서 이 말씀들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여러 기도원들과 은사주의 교회들에서 실행되고 있는 거짓 은사로서의 소위 “신유”에 대해서도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시던 간에 그들이 치유받았다는 “체험”만을 강조한 채 성경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이고도 절대적인 권위 위에 자기들의 체험과 전통을 올려놓는 것이 아닌가?
서로 다른 권위가 부딪치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 6:24),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요일 2: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할 수 없다(고후 6:15) 등, 여러 번에 걸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흑백논리일 수밖에 없다. 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면 우상이 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인데,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앞세운다면 우리는 그것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물을 섬기는 것이고, 지식을 섬기는 것이고, 철학을 섬기는 것이고, 인간적인 권위와 전통을 섬기는 것이고, 자신의 체험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우상 숭배가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다.
에스겔 8장에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환상 가운데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시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서 에스겔은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기막힌 우상 숭배의 모습을 목격한다. 첫째는 성전 담에 갖가지 모양의 기어다니는 것들과 가증스런 짐승들과 우상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앞에서 사람들이 향을 피워 올리고 있었고(겔 8:10,11), 둘째는 주의 집의 대문 입구에서 여인들이 탐무스를 위해 울고 있었으며(겔 8:14), 셋째는 성전의 문, 즉 제단 앞에서 사람들이 태양 쪽을 향하여 태양을 경배하는 것이었다(겔 8:16).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증한 범죄로 인해 유다를 심판하셨다. 이러한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는 전혀 머무를 수 없으며, 이쯤되면 도저히 성전이라 불릴 수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에스겔의 이 기사를 읽을 때 유다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잘못했다고 비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라.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수많은 우상들로 가득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을 것같아 보이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자처하는 곳, 진리의 기둥과 터전(딤전 3:15)이 되어야 할 곳들에서 이러한 우상 숭배가 행해진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이 세상의 배교에 대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실 수가 있으며, 어찌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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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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